세상 사는 이야기

아내라는 이름이 돌아왔다^^

비단모래 2014. 11. 17. 14:46

  23년간 집 나가서 주부를 포기했던 아내라는 이름이 돌아왔다.

처음 집을 나가면서 다짐 한 것은 남편보다 늦게나가고 일찍 돌아오는 것

아이들이 찾을 때는 언제나 곁에 있을 것

얼마 번다는 이야기를 하지 말것 이었다.

한동안 그 약속은 잘 지켜졌고 그렇게 약속을 지키자 아내가 밖에 나가는 것을 마뜩찮게 생각하던 남편도

마음이 놓였는지 별 말을 하지않았다.

그러나 사회생활이란 그렇게 녹록치 않음을 남편도 알았을것이다.

세번째 약속 돈에 관한 약속은 지킬 수 있었지만 두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일이 늘어갔다.

 

사회가 어디 그런가

나가보니 피치못하게 회식자리도 가야했고

늦은 회의로 시계를 들여다보며 안절부절 해야했고

아이의 학교를 가보거나 하지도 못했고 아이가 몇학년 몇반인지도 모를때도 있었다.

아이가 아파도 직장을 나가야했다.

거기다 아내가 아파도 직장은 나가야했다.

 

그러며 아내는 직장인의 모습으로 옷을 갈아입고 주부라는 옷을 아예 벗어버렸다.

남편의 와이셔츠 양말은 남편 스스로 해결해야 했고

아이들 체육복도 운동화도 아이들이 스스로 챙겨야 했으며

집안청소 음식도 그냥 되는대로 였다.

어느땐 일주일도 청소기를 돌리지 않았고(다른 워킹맘들은 이렇지 않고 나만 그렇다는 걸 )

반찬거리 장만하느라 시장을 가지않았다.

 

철저히 주부노릇을 하지않았다.

급기야 퇴직을 한 남편이 주부선언을 했고

아침밥부터 내가 먹는 약 . 양파와인, 사과요플레, 계피꿀 을 내게 대령하기 시작했다.

가만히 앉아서 받아먹는 나는 시간이 지나자 미안함도 없었고

그저 당연히 받는 사람으로 인식 되어가기 시작했다.

 

그런 아내라는 이름이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직장을 더이상 나가지 않게되었다.

 

시원 후련한 감정으로 집으로 돌아왔으나 오늘 아침은 막막했다.

오늘 아침도 남편에게 아침상을 받았다.

그런데 이상하게 떳떳하지 않았다.

설거지는 그냥두라는 말이 나왔으나 남편은 설거지 까지 깨끗하게 해놓고 자신의 일 때문에 나가고

습관처럼 세수를 하고 화장을 하고 드라이를 했다.

23년간 아침이면 해온던 일이다. 밖에 나가야 할것 같았다.

 

냉동실을 뒤적였다.

별별 것이 다 들어있었다. 조기 떡 대추 콩 깨..그동안 주부가 외면했던 냉장고는 그야말로 침묵의 속을

드러내고 있었다.

한우족이 들어있어 꺼내 물에담갔다.

마른 시레기도 꺼내 물에 담가놓았다.

무얼 해야할지는 모르지만 일단 반찬거리가 있다는 것에 안도했다.

 

23년의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며 남편에게 봉투하나를 받았다.

프리랜서로 일했으니 퇴직금이 없을거라고..집으로 돌아오는 환영금을 준비했다는 것이다.

당분간 마음놓고 쓰라는 것이었다.

 

아침부터 안경점을 갔다.

 

참 이상하게 두개의 안경테가 부러졌다.

하나는 잃어버렸다.

테가 늘어진 검정안경 하나 밖에 남지않았다.

 

보랏빛이 짙은 안경하나를 맞추고 늘어진 안경테를 고쳤다.

그리고는 계룡으로 달렸다.

유성 톨게이트를 지나 가을끝자락의 고속도로를 달리니 마음이 상쾌했다.

 

계룡에서 고등학교 선생님을 하고 있는 묭에게 갔다.

묭은 서슴없이 나왔고 함박스테이크로 거한 점심을 샀다.

 

성..이제 정말 또 다른 인생 시작이네.

장수가 천재라니 건강조심하고 신나게 잘 살어. 암때나 계룡오고

오면 같이 밥 먹자. 인생이 힘든날 다리가 되어줄게.

 

내가 하던 일을 그만둔다고 했더니 이런 문자를 보냈던 친구다.

일부러 묭을 만나러 간것은 아니지만 우연히 계룡에 갈 일이 생겨 간 김에 묭을 만났지만

정말 환대를 받았다.

 

묭은 돌아오는 길에 볼펜 10자루를 안겼다.

새로운 인생을 쓰라는 뜻이리라.

 

헤어지고 돌아오며 내가 다니던 직장을 지나왔다.

코끝이 찡했다.

 

집으로 돌아와 한우족을 안쳤다.

아침에 담가놓아 핏물이 빠졌다.

생강 무 양파를 넣고 지금 팔팔 끓이고 있는 중이다.

 

이제 한우는 뼈속까지 자신이 가졌던 진국을 우려낼것이다.

시간이 지나면 아주 뽀얀 국물로 오랫만에 남편의 식탁을 즐겁게 할 것이다.

남편은 밥 걱정은 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지금처럼 밥도 해주고 할 테니 부담갖지 말라는 것이다.

 

그럴것이다.

부담갖지는 않을것이다.

그냥 나는 모처럼 남은 시간을 채우기 위해 무언가 하고 있을 뿐이다.

언제 나에게 이런 여유있는 시간이 있었는지...23년간 단 한번도 여름휴가를 가보지 못했던

시간들속에게 갑자기 많은 시간이 내게 다가오니 지금은 솔직하게 뭘해야 될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제 나는 아내라는 이름표를 다시 달아 볼 예정이다.

한동안 남편이 잃었던, 아내의 식탁에 앉아보게 할 예정이다.

얼마나 갈 지 모르지만.

 

한우뼈가 폭폭 끓는 소리가 난다.

뚜껑 한 번 열어 내 마음까지 우러나게 고아야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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