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시(詩)

[스크랩] 아버지 시 모음

비단모래 2014. 7. 11. 13:25

* 아버지 - 고은 

아이들 입에 밥 들어가는 것 극락이구나

 

* 아버지 - 고은 

강건너 예포 일대

대천장 에산장 서산장

아무리 고달픈 길 걸어도

아버지는 사뭇 꿈꾸는 사람이었습니다

비 오면 두 손으로 비 받으며

아이고 아이고 반가워하는 사람이었습니다

 

* 고향 난초 - 서정주

내 고향 아버님 산소 옆에서 캐어 온 난초에는
내 장래를 반도 안심 못하고 숨 거두신 아버님의
반도 채 다 못 감긴 두 눈이 들어 있다.
내 이 난초 보며 으스스한 이 황혼을
반도 안심 못하는 자식들 앞일 생각다가
또 반도 눈 안 감기어 멀룩멀룩 눈 감으면
내 자식들도 이 난초에서 그런 나를 볼 것인가.
아니, 내 못 보았고, 또 못 볼 것이지만
이 난초에는 그런 내 할아버지와 증조할아버지의 눈,
또 내 아들과 손자 증손자들의 눈도
그렇게 들어 있는 것이고, 들어 있을 것인가.

 

* 논 - 김용택 
오늘은 장마로 불어난 강을 건너
집에 가야겠다.
강을 건너 벗은 신을 들고
심어논 벼들이 돌아앉는 논두렁을 지나면
삽을 메고 논 가득한 벼를 바라보며 서 있는
아버지의 곁에 서보려 한다.

- 올해는 벼들이 일찍 깨어나네요
- 그렇구나

쌀보다 나락을, 나락보다 논 가득한 벼를
벼보다 겨울 논을 더 좋아하시는 아버지
아버지의 농사는 언제나
논에서 풍년이고
논 밖에서 흉작인데
내 농사는 논 밖에서 풍년이고
논 안에서 흉년입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비는 아버지 일생의 피이고
내게서 비는 저 흐린 허공의 비애입니다.

- 집에 가자
- 예 아버지

아버지, 논으로 울고 논으로 웃고
논으로 싸워 아버지의 세상과 논을 지키신 아버지
아버지의 적막하게 굽은 등이
오늘따라 왜 이리 넉넉합니까
집에 들면 강 건너 밭 지심을 걱정하시는
어머님 곁에 앉으셔야
맘이 놓이시는 아버지
우리들이 아내는 우리들의 마음을
무엇으로 안심시킬까요
아버지.

 

* 아버지의 가을 - 정호승

아버지 홀로

발톱을 깎으신다

 

바람도 단풍 든

가을 저녁에

 

지게를 내려놓고

툇마루에 앉아

 

늙은 아버지 홀로

발톱을 깎으신다

 

* 아버지의 런닝구 - 안도현 
황달 걸린 것처럼 누런 런닝구
대야에 양잿물 넣고 연탄불로 푹푹 삶던 런닝구
빨랫줄에 널려서는 펄럭이는 소리도 나지 않던 런닝구
白旗 들고 항복하는 자세로 걸려 있던 런닝구
어린 막내아들이 입으면 그 끝이 무릎에 닿던 런닝구
아침부터 저녁까지 지게를 많이 져서 등판부터 구멍이 숭숭 나 있던 런닝구
너덜너덜 살이 헤지면 쓸쓸해져서 걸레로 질컥거리던 런닝구
얼굴이 거무스름하게 변해서 방바닥에 축 늘어져 눕던 런닝구
마흔일곱 살까지 입은 뒤에 다시는 입지 않는 런닝구

 

* 아버지 - 나해철

나는 나의 아버지

내가 앞서가며 나를 불렀다

알 수 없는 곳에도 길을 놓고

디뎌 밟으며 뒤따르는 나에게

무어라 이름 가르치며 살았다

앞이 안 보일 때도

나를 위하여 아버지인 나는

마음을 숨긴 채 웃었다

 

그리운 아버지

아버지의 오랜 병은 언제나 끝나나요

저를 언제나

끌어안고 볼기짝을 때려주실라나요

하늘의 큰 곰자리는 가르쳐 주실라나요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요

다 커서

나의 아버지 노릇도 이제 더 못해요

 

* 귀여운 아버지 - 최승자 
눈이 안 보여 신문을 볼 땐 안경을 쓰는
늙은 아버지가 이렇게 귀여울 수가.
박씨보다 무섭고,
전씨보다 지긋지긋하던 아버지가
저렇게 움트는 새싹처럼 보일 수가.

내 장단에 맞춰
아장아장 춤을 추는,
귀여운 아버지,
오, 가여운 내 자식. *

 

* 가을 내소사에서 아버지를 만났다 - 고광헌
 가을 내소사엘 갔다
 나무들이, 어릴적 소판 돈 털리고 돌아온 아버지처럼
 너른 어깨를 늘어뜨리고
 날 맞았다
 열세 살, 내 간절한 기도를 아버지는 알았을까
 아무런 위안도 되지 못한다고 생각된 내 기도를 저주했다
 키 큰 나무들 사이로 떨어지는
 서늘한 햇살 속으로
 눈부신 옥양목 두루마기 입으신 아버지 걸어가신다
 순백의 등뒤로 떨어지는
 활엽, 활엽, 활엽들
 내소사 부처님들 시간 속으로 함께 숨어 버린다
 아버지도 저처럼, 한번쯤 자유로웠을까

 까탈 부리기 시작한 두 무릎 위에
 세속 도시의 시간들 들쳐메고 찾은 내소사 숲에서
 삼십여년 전, 소판 돈 털린 뒤 소울음 삭이며 자장면 사주시던
 아버지를 만났다

 유별나게 소매치기에게 돈을 잘 털려
 어머니에게 혼나시던 아버지
 하지만
 결코 인생은 털리지 않은 아버지를
 가을 내소사 숲에서 만났다.

 

* 아버지의 등 - 정철훈 
만취한 아버지가 자정 넘어
휘적휘적 들어서던 소리
마루바닥에 쿵, 하고
고목 쓰러지던 소리
숨을 죽인다
한참 만에 나가 보았다
거기 세상을 등지듯 모로 눕힌
아버지의 검은 등짝
아버지는 왜 모든 꿈을 꺼버렸을까
사람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검은 등짝은 말이 없고
삼십년이나 지난 어느날
아버지처럼 휘적휘적 귀가한 나 또한
다 큰 자식들에게
내 서러운 등짝을 들키고 말았다
슬며시 홑청이불을 덮어주고 가는
딸년 땜에 일부러 코를 고는데
바로 그 손길로 내가 아버지를 묻고
나 또한 그렇게 묻힐 것이니
아버지가 내게 물려준 서러운 등짝
사람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검은 등짝은 말이 없다.

* 아버지의 욕 - 이정록

"운동화나 물어뜯을 놈"

어릴 적에 들은 아버지의 욕

새벽에 깨어 애들 운동화 빨다가

아하, 욕실바닥을 치며 웃는다


사내애들 키우다보면

막말하고 싶을 때 한두 번일까 마는

아버지처럼, 문지방도 넘지 못할 낮은 목소리로

하지만, 삼십년은 너끈히 건너갈 매운 눈빛으로

'개자식'이라고 단도리칠 수 있을까


아이들도 훗날 마흔 넘어   

조금은 쓸쓸하고 설운 화장실에 쪼그려 제 새끼들 신발이나 빨 때

그제야 눈물방울 내비칠 욕 한마디, 어디 없을까

"운동화나 물어뜯을 놈"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한 나는

"광천 쪽다리 밑에서 주워온" 고아인 듯 서글퍼진다


"어른이라서 부지런한 게 아녀

노심초새한테 새벽잠을 다 빼앗긴 거여"

두 번이나 읽은 조간신문 밀쳐놓고 베란다 창문을 연다

술빵처럼 부푼 수국의 흰 머리칼과 운동화 끈을

비눗물방울이 잇대고 있다 *

* 이정록시집[정말]-창비

 

* 서창, 해장국집 - 전성호 

비오다 그친 날, 슬레이트집을 지나다가
얼굴에 검버섯 핀 아버지의 냄새를 맡는다

양철 바케쓰에 조개탄을 담아 양손에 쥐고 오르던 길
잘 열리지 않는 문 앞에서 언 손으로 얼굴 감싸쥐어도
겨울 새벽은 쉬 밝아오지 않고,
막 피워낸 난로 속 불꽃은 왜 그리 눈을 맵게 하던지
닫힌 문 작은 구멍마다 차가운 열쇠를 들이밀면
낡은 내복 속 등줄기를 따라 식은땀 뜨겁게 흘러내렸다

한달치 봉급을 들고 아들이 돌아오면
아버지는 마른 정강이를 이끌고 해장국집으로 갔다
푹 들어간 눈 속으로 탕 한 그릇씩 퍼담던 오후
길 끝 당산나무에 하늘 높이 가슴치는 매미 울음소리 속에서
아버지와 아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껴안을수록 멀어지는 세상
우산도 없이 젖은 머리칼을 털며
서창 해장국집 문을 열고 들어서면
습기 찬 구름 한덩이 닫힌 창 밖으로 빠르게 흘러가고
검버섯 핀 손등 위로 까맣게 아버지 홀로 걸어가신다

살다 허기지면 찾아가는 그 집
금빛 바늘처럼 날렵한 울음 사이로
까마귀 한 마리 잎을 흔들며 날아간다 *

* [걸었던 자리마다 별이 빛나다]-창비시선 300 기념시선집 

 

* 산양 - 이건청  
아버지의 등뒤에 벼랑이 보인다. 아니, 아버지는 안 보이고 벼랑
만 보인다. 요즘엔 선연히 보인다. 옛날, 나는 아버지가 산인
줄 알았다. 차령산맥이거나 낭림산맥인 줄 알았다. 장대한 능선
들 모두가 아버지인 줄만 알았다. 그때 나는 생각했었다. 푸른 이
끼를 스쳐간 이 큰 산의 물이 흐르고 흘러, 바다에 닿는 것이라
고, 수평선에 해가 뜨고 하늘도 열리는 것이라고. 그때 나는 뒷짐
지고, 아버지 뒤를 따라갔었다. 아버지가 아들인 내가 밟아야 할
비탈들을 앞장서 가시면서 당신 몸으로 끌어안아 들이고 있는 걸
몰랐다. 아들의 비탈들을 모두 끌어안은 채, 까마득한 벼랑으로
쫓기고 계신 걸 나는 몰랐었다.
 
나 이제 늙은 짐승 되어 힘겨운 벼랑에 서서 뒤돌아보니 뒷짐 지
고 내 뒤를 따르는 낯익은 얼굴 하나 보인다. 아버지의 이름으로
쫓기고 쫓겨 까마득한 벼랑으로 접어드는 내 뒤에 또 한 마리 산
양이 보인다. 겨우겨우 벼랑 하나 발 딛고 선 내 뒤를 따르는 초
식동물 한 마리가 보인다.

 

* 아버님의 안경 - 정희성 
돌아가신 아버님이 꿈에 나타나서
눈이 침침해 세상일이 안 보인다고
내 안경 어디 있냐고 하신다
날이 밝기를 기다려 나는
설합에 넣어둔 안경을 찾아
아버님 무덤 앞에 갖다 놓고
그 옆에 조간신문도 한 장 놓아 드리고
아버님, 잘 보이십니까
아버님, 세상일이 뭐 좀 보이는 게 있습니까
머리 조아려 울고 울었다 *

출처 : 염생이
글쓴이 : 염생이 병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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