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르메스 버킨백 사자" 대기번호 1000번!에르메스 버킨백 사자" 대기번호 1000번!개당 1000만원이 넘는 에르메스의 버킨(Birkin) 핸드백을 사기 위해 순서를 기다리는 국내 요즘 구매 대기자가 1000여명이 넘는 것으로 나타났다는 한 가방이 있다.
이것을 구매하기 위해서 1000만원이 넘는 선불을 내고 번호표를 받은 대기자가 1000명이 넘는다고한다.
이것은 프랑스에서 수작업으로 만들어 진다고 하는데..
뭐라 말 할 수없는 ...
가방...정말 일상생활에 꼭 필요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것저것 다 들고 다닐수 없으니..어떤 공간이 필요하다.
요즘은 3살만 먹어도 벌써 놀이방 가방을 지고 나가는 세월이 되었다.
나는 초등학교 1학년 들어가면서 처음 무언가를 담을 수 있는
가방을 마련하게 되었다.
실은 가방이 아니라 다우다 보자가였다.
(이 다우다는 일본말인것 같은데 우리나라 말로는 무얼까?)
꽃 무늬가 그려진 보자기에 책을 싸서 허리에 질끈 묶었다.
(오빠들은 어깨에 가로질러 맸다. 작은오빠는 친구들과 싸울때는 이 책보를 머리에 묶었다고 한다)
학교를 갈때는 엄마가 묶어주셔서 잘 풀어지지 않았는데
학교에서 돌아올때는 내가 제대로 묶지 못해서 풀어져 책이나 필통이 땅바닥에
굴렀다.
이 책보자기를 묶고 달리면 양철 필통에 들어있던 연필이 딸그락 거렸다.
그시절은 연필질도 별로 좋지않아 그렇지 않아도 연필심이 잘 부러졌는데
그렇게 뛰고나면 연필심은 있는대로 부러져 있었다.
10개 들이 크레용도 잘 부러졌고
학교에서 주전 옥수수빵도 보자기안에 싸서 집에 가져 오곤했다.
이렇게 연필이 부러지면 저녁에 아버지께서 연필을 깍아 나란히 필통에 넣어주셨다.
몽당연필이 되면 붓뚜껑을 끼워 주셨다.
내일 학교갈 준비로 책이랑 공책 필통을 보자기에 돌돌 싸서 머리맡에 두고 자면 그만이었다.
이 가방이..대전으로 이사오면서 내인생의 트라우마..지워지지 않는 상처가 되었다.
초등학교 2학년을 마치고 대전중학교에 합격한 오빠때문에 우리는 낯선 대전으로 이사오게 되었다.
내가 다닐 초등학교는 보문산 자락아래..
보문산 정기어린 우리학교는 이름도 새로워라 대신입니다
라는 교가로 시작되는 대신초등학교였다.
봄방학에 대전으로 이사를 온 나를 데리고 아버지는 저녁에 학교운동장엘 가셨다.
학교가 높은 위치에 있어서 대전거리가 내려다 보이는 곳이었는데
그때는 가로등이 있는 거리는 서대전에서 유성으로 가는 길뿐이었다(물론 내가 본곳이 거기라서 다른곳은 잘 모름)
그길의 가로등이 길게 서있는 것을 보고..등잔만 켜던 시골에서 이사온 나는 전깃불을 보고
아버지 왜 대전에는 별이 땅에 있어요? 라고 물었다고 한다.(이때부터 시인기질이 있었나...?)
봄방학이 끝나고 새학기가 시작된 3월초..나는 3학년으로 대전의 학교생활이 시작되었다.
선생님 뒤를 따라 교실로 들어가서 선생님의 소개를 받는데...
70명이 넘은 아이들이 한꺼번에 함성을 질렀다.
"와...촌뜨기왔다..."
책상을 치기도 하고 발을 구르기도 하면서 웃는 아이들을 보고 정말 시골에서 온나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아이들이 왜 나를 촌뜨기라고 하는지 이해도 못했다.
선생님이 조용히 하라고 책상을 치시고 난 후 난 자리에 가서 앉았다.
남자 짝꿍이었다.
하루종일 나는 왜 대전으로 전학와서 이렇게 창피한지 생각했다.
시골에서는 큰오빠가 학생회장이었고..아버지가 하얀 모시적삼을 입으시고 학교를 종종오셔서 그야말로
공주대접을 받고 다녔는데 도시의 학생들은 너무 생경했다.
그리고 참 쌀쌀했다.
나는 그날 오후 종례시간에 아이들이 왜 나를 촌뜨라고 했는지를 알았다.
아이들은 모두 가방을 가지고 있었다.
여자애들은 빨간색 끈이 있는 가방 ..남자애들은 푸른색이나 감색의 가방을 어깨에 메는데
나만 보자기로 싼 책보를 가지고 있었다.
책보를 허리다 매다가 그만 부끄러워 풀고 말았다.어디로 숨고 싶었다.
집에 돌아와 엄마앞에서 울었다.
"엄마 나만 이런거 가지고 가서 애들이 촌띠기 라고 놀렸어.."
왜 그렇게 슬펐을까?
내가 가방을 가지게 된건 그후로 몇달이 지나서일거다.
우리집이 너무도 가난해서 가방을 살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에 그 지옥같은 시간속에서 나는
달팽이처럼 마음을 숨기고 다녔다.
나는 용기가 없었다.
아는게 있어도 손을 들 수 없었고 발표를 시키면 모기소리만한 목소리가 더 기어들어갔다.
(내가 지금 이렇게 20여년간 방송작가를 하고 남들앞에서 시낭송을 하고 때때로 강연을 하고
아이들을 가르치는것을 보면 어디서 이런 용기가 났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그렇게 쓸쓸하게 졸업을 했다.
나는 그후 가방에 대해 참 많은 상처를 가지고 살았다.
이상하게 가방을 사지않았다.
늘 아랫 집 사는 동생이 주는 가방을 가지고 다녔고..왜 그렇게 가방사는 것에 익숙하지 않았나 모르겠다.
올해 나는 가방 하나를 샀다.
나도 이젠 뭐뭐 메이커가 있는 가방을 들어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나를 간수할 수 있을 만큼의 돈도 버는데..
시누이가 옷도 팔고 가방도 팔고 구두도 파는데
그곳에 가서 나는 그동안의 내 생각과는 다르게 거금을 들여..체크무늬가 있는 가방을 샀다.
그런데 말이다..
내 것 같지가 않다.
잘 들고 다니지 못하고 있다..왜 그럴까..정말 나는..
다우다에 대한 인터넷 검색
1. 일상적으로 알려진 이름은 <다우다> 보다는 <다후다>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 이름이 이러게 불러지게 된 것은 영어의 taffeta 를 일본어로 タフタ(타후타, 다후다)로
번역되어 우리나라는 그 것을 그대로 <다후다>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영어의 발음이 일본사람들은 <타후타>에 가장 가깝습니다.
2. 태피터( taffeta [tǽfit] )는 일명 호박(琥珀) 박단(薄緞)이라 하여 얇으면서
약간 단단하고 치밀한 평직(平織)의 명주로 된 비단을 말합니다.
3. 호박단 [琥珀緞, taffeta]의 사전적인 의미를 더하면,
평직(平織)으로 짠 견직(絹織) 비단이며 태피터라고도 합니다. 날실은 가는 숙명주실을 치밀하게 사용하고, 씨실은 굵은 숙명주실을 사용하여 평조직으로 짜서 씨실 방향으로 이랑을 나타낸 직물이라고 합니다. 화학섬유를 사용한 것에는 자카드를 사용한 무늬 호박단도 있습니다. 여성들의 치마·저고리 감이나 양산감으로 쓰입니다. 최근에는 화학섬유를 사용한 호박단이 많이 생산되고 있습니다. 4. 그런데 <다후다>라는 이름이 우리나라에서 유행을 하게 된 것은 나일론 섬유가 등장하던 1960년대에 나일론 필라멘트로 얇고 치밀하게 짜서 각종 옷이나 천막, 우산 등에 사용되었던 때일본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부터 입니다. 5. 지금도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다후다>는 나일론 100%로 얇게 짠 것을 말하고 있으나 원래는 명주실로 얇고 치밀하게 짠 비단을 의미합니다. 6. 결론은 <다후다>는 일본어인데 부적절하게 우리말 처럼 고착화되어진 현상이 있고 <테피터>라고 하려니 어색하고 우리말로는 한자어에 가깝지만 <호박단>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혼자 호박단이라고 강제할 수는 없고 아무튼 다후다가 바람직한 것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에르메스코리아 관계자는 "물량은 부족한데 국내 수요는 너무 많아 한때 대기자를 아예 안 받은 적까지 있다"며 "프랑스 본사에서도 '한국이 왜 이러느냐'며 놀라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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