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이혼전문변호사
#스피치
#계란빵과 아버지
결혼은 계약이다
그 계약은 해지할 수있다
간디는 40에 해혼(解婚)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오늘
머리가 띵하게 아프도록
먹먹했다
ᆢᆢᆢᆢ
첫경험에 대한 나의 이야기는
계란빵과 아버지였다
사연 없는 삶이 어디 있으랴
책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나는
왜 그렇게 생의 마디마디 사연이
많을까
1996년ᆢ남편이 다니는 회사가
부도가 났다고 대서특필 되었다
나는 ^그럼 월급은?^부터 머리속을
채웠다
수 만명 직원의 생계를 책임지던
노아의 방주같은 남편의 직장
큰 아들은 대학입시를 고2였고
작은 아이는 중3
두 아들이 먼저 눈 앞에 다가왔다
매달 10일 이면 어김없이
웤급봉투를 가지고 와
아이들에게 모처럼 통닭이나 먹고싶은것
을 먹일 수 있었고
한 달에 한 번 남편은 뿌듯한 웃음을
웃었었다
그런데 부도라니
복잡한 단어는 모르겠고
나는 그저 그럼 월급은?ᆢ생각만 가득했다
반전에 반전만 거듭하는 나의 삶은
그 불안감은 적중했다
10일이 돌아와도 빈 손으로 들어왔고
남편동료들은 회사를 떠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남편은 내 아들을 살린 회사를
끝까지 지키겠다고 했다
월급이 나오지 않았다
적금을 와장창 깼다
나중에 만약에 ᆢ하고 들어놓은 보험도
지금ᆢ하고 해약했다
거기에 생전 들어보지 못한 IMF라는
날 선 바람이 달려들었다
그리고
찬 바람부는 거리에 섰다
계란빵 포장마차를 시장 버스정거장 앞에
세웠다
빵은 탔고
우리는 그걸 식사대용으로 꾸역꾸역
넘겼다
포장마차는 가끔 불법으로
거리에서 쫒겨났고
생은 그 리어카를 끌고
눈 내리는 거리를 비틀거리며 걸었다
어느날
적막같은 포장마차에 친정아버지께서
찾아오셨다
엄마가 솜버선과 털신을 사서 보내셨다
엄마는 차마 거리에 선 딸을
볼 수없어 못오셨다고 한다
아버지는 계란빵을 포장해
달라하셨고
돈과 함께 흰 종이를 내미셨다
사후신체기증서
거기에 사인하라는 거셨다
왜 하필 내가 거리에 섰을 때
이런 막막한 도장을 찍으라 하시냐고
울었다
^이 세상에 와서 공헌 한 일 없고
자식들 고생만 시킨 부모
몸 이라도 세상에주고싶다^
그 말씀에 나는 싸인을 하고 말았다
결국 나의 부모님은
사후신체를 병원에 헌체 하셨고
나는 여러번 잠에서 소스라쳐 놀라
깨기를 반복했다
지금은
천 갈래 가른 몸으로
소영원에 잠들어 계시지만
위대하고 특별한 부모님의
유전자 때문에
간혹 진지해지기도 한다
그해 크리스마스 저녁
케잌을사들고 포장마차를 찾아온
부부가 있었다
그들은 눈물겨운 감동의 빵을
먹게했고 그 힘은 지금까지
내가 살아가는 절반의 응원이 되었다
그 인격이ᆢ지금은
사장님 이라는 위치에
올라도
변함없다는 걸 느낀다
그후 남편의 회사는 기적처럼
봉고신화를 만들어냈고
화려하게 다시 일어섰다
30여년 직장에 몸담고
퇴직할 수있는 행운으로
계란빵 포장마차는
추억의 페이지에 접혔다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이길 힘을 경험했다
그 후도 많은 고비를 넘겼지만
우리는 바람에 쓸려도
꺾어지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