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사는 이야기

용담댐 해바라기

비단모래 2009. 7. 18. 21:10

 

 아버님 드실 반찬을 해서 드리고 돌아오는 길

용담댐에 물이 그득하다

얼마전 까지도 지날때마다 집터가 드러나 있었는데

찰랑한 댐을 보니 마음이 든든하다.

 

비가 많이 내려 수해를 입은 곳이 많은 반면 물 부족은 어느정도 해결 됐으니

얼른 피해복구를 해서 풍요로운 가을을 맞았으면 한다.

 용담댐 건너편

수천평에 아기 해바라기 꽃이 피었다

코스모스까지 어우러져 그야말로 장관이다.

 

남편이 그냥 지나칠리 없다

내리자 더니 꽃밭에 세워놓고 정지된 순간을 담는다

이 순간 내 생애 가장 마지막 젊은 순간이 피사체로 남는다

 해바라기

인상주의의 대표적인 화가 빈센트 반 고흐의 작품으로 아를에서의 시기에 그려졌으며, 해바라기는 태양처럼 뜨겁고 격정적인 자신의 감정을 대변하는 영혼의 꽃이라 할 수 있다.
작가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
종류 캔버스에 유채
크기 91×72cm
제작연도 1888년
소장 뮌헨 노이에 피나코텍(Neue Pinakothek)
해바라기 / 독일 뮌헨 노이에 피나코텍 소장.
본문
빈센트 반 고흐(1853∼1890)는 1888년 프랑스 파리에서 남부 아를(Arles)로 거처를 옮겼다. 그곳에서 그는 동료 화가인 폴 고갱과 함께 작업하기를 기대하면서 고갱을 위해 작은 집을 빌려 노란색으로 페인트를 칠한 후 해바라기 꽃을 그린 그림으로 장식하였다. 이 작품은 그때 그려진 《해바라기》연작 가운데 하나로 반 고흐에게 '태양의 화가'라는 호칭을 안겨준 중요한 작품이다.

반 고흐는 동생 테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노란색 꽃병에 꽂힌 열두 송이의 해바라기에 대해 언급하며 "이것은 환한 바탕으로 가장 멋진 그림이 될 것이라 기대한다"고 쓰고 있다. 《해바라기》는 색채, 특히 노란색에 대한 열망으로 가득 찬 작품이다. 반 고흐에게 노랑은 무엇보다 희망을 의미하며, 당시 그가 느꼈던 기쁨과 설렘을 반영하는 색이다. 더불어 대담하고 힘이 넘치는 붓질은 그의 내면의 뜨거운 열정을 드러내 보여준다.

후기 인상주의의 대표적인 화가인 반 고흐는 꽃의 섬세함을 포착하면서도 자신이 본 것을 그대로 재현하기보다는 빛과 색채를 통한 감각과 감정을 표현하고자 하였다. 반 고흐의 《해바라기》는 이글거리는 태양처럼 뜨겁고 격정적인 자신의 감정을 대변하는 영혼의 꽃으로 그의 짧고 비극적인 삶과 예술을 거울처럼 반영하고 있다.

고갱에 대한 열광적인 환영의 의미로 그린 이 작품이 완성되고 몇 달이 지난 후 반 고흐는 고갱과의 불화로 자신의 귀를 자르며 정신발작의 멍에를 짊어지게 된다. 그토록 고대하던 고갱과의 동거는 두 달이 채 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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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바라기는 콜롬부스가 아메리카 신대륙을 발견한 후에

유럽에 전해진 꽃이다.   당시에는 이 꽃의 모양새로부터  '인디안의 태양'이나  '페루의 황금꽃' 이라는 말로 불러졌다.    페루에서는 태양을 숭배하는 태양신앙이 대단히 성행하여 해바라기 꽃이 존중되었으며 신성한 꽃이라고 하여 받들어졌다고 한다.   태양신전의 여제사장들은 황금으로 만들어진 해바라기 형태의 관을 쓰고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영국명인 선플라워와 또 다른 이름인 헤리안사스라는 말 도 태양의 꽃이라는 뜻이다,

   해바라기가 유럽에 전해지기 전에는 태양의 꽃으로 알려진 꽃은 금잔화였다.   처음에는 '커다란 태양의 꽃'이나 '인디안의 태양꽃'이라는 말로 금잔화와 구별하여 불러졌지만, 어느 샌가 태양을 가리키는 꽃을 이야기하게 되면 자연스럽개 해바라기를 꼽게 되었다고 한다.    동남 아시아나 독일, 이탈리아, 인도, 중국 등에서는 해바라기의 씨를 따서 먹기도 하고 기름을 짜서 사용하기도 하기 때문에 식용을 목적으로 개량되어진 품종은 꽃의 심이 커다랗고 꽃잎이 짧게 되어 있다.

 

♤ 해바라기는 태양 신앙으로부터 태양과 함께 받들어진 이유로부터

'숭배'라는 꽃말이 붙어졌다. 또 다른 꽃말로는 '거짓된 부'나 '가짜금화'도 있다.

                         네이버 지식 펌 

 

 해바라기는 어디를 향해 있는걸까

사진을 찍을 때는 모두 해를 등지고 있었는데..

 

신혼초부터 시댁을 간다면 참 신이났다.

가는 길이 아름다워서 가서 8남매 맏며느리의 어려움은 잊고 환호하며 다녔다.

4계절 꽃피고 지고 푸르고 눈에 덮이고

그런 길을 30년째 다니고 있다.

 

예전처럼 들뜨기만 하진 않지만(아버님 혼자 계시니)

아직도 나는 이 길을 사랑하는 걸 보면 ..철이 안든 건지..아님 남편을 사랑하는 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