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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과 사랑은 문학이 아니라 신의 조정에 의한 섭리

비단모래 2009. 7. 17. 11:23

 

 

죽음과 사랑은 문학이 아니라 신의 조정에 의한 섭리 아닐까?

 

오늘아침 K본부 아침마당에서 존엄사 찬성인가 반대인가에 대한

의견을 물었다.

거의 10대1정도로 찬성이 많았다.

어려서 나 피 젊은때는 그리고 내게 책임감이 없었을때는 부모에게 불효한다는 이야기만 나와도 내가 무슨 효를 다하는 양 목소리를 높였다.

어찌 부모를...

 

하지만 내 나이가 들고 내 몸이 약해져가고 마음마저 약해지고 있으니

그리고 곁에 연로하신 아버지가 계시니

마음과 행동이 늘 따로다.

 

솔직하게 고백하건대 긴병에 효자없다는 말에도 스스로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고

또 오늘아침에 나왔던 13년간 어머니를 간병하고 있는 '엄마는 소풍 중'이란 저자 이야기를 들으면서는 내 아들도 저 같았으면 하는 어이없는 바람도

가져본다.

 

한 패널이 죽을때 우아하게 죽고 싶다고 하자

한병원관계자(윤방부 교수)는 죽음은 문학이 아니다

문학에 의해 써지는 아름다운 죽음은 없다

죽음은 처절하다. 라는 말에 공감이 가기도 하고

 

긴병을 앓는 환자가족의 고통이나 경제적 원인으로 분열되는 모습을 지켜

보는 것이 안타깝다는 것도 이해가 간다.

긴 고통을 당해보신 분들의 이야기도 또 내일이 아니라 건너편에서 보는

분들의 이야기도 모두 그럴 것 같다.

 

 

나에게는 나보다 한살위인 시외숙모가 계시다.

남편의 막내 외삼촌이다.

외숙모는 19살에 9살많은 가난한 외삼촌에게 시집오셨다.

그야말로 달동네 하꼬방이라는 곳에서 신접 살림을 시작했고

삼촌은 신문 돌리는 일로 가장 역활을 했다.

딸 셋을 낳고 외숙모는 거리의 나전에 섰다.

비바람 눈보라 막을 수없는 거리에서 몇년간 신문가판과 껌 몇개를 놓고

팔았다.

 

근근히 딸들을 가르쳐 결혼시켰고

이제 두분이서 집하나 장만했으니 행복하게 살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3년 전

삼촌에게 인지능력이 없어진 치매성 뇌병변이란 병이 찾아왔다.

약 오르고 속상한 시간이 시작되었다.

 

외숙모 나이 50에 그 남편과 긴 투병생활로 접어들었다.

나도 ...남들도...

시설에 맡기고 숙모가 편히 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은건 사실이다.

아직 젊은 외숙모의 여자의 일생이 가여웠다고 할까?

하지만 외숙모생각은 달랐다.

아무것도 모르는 자식..애기같은 사람을...딸도 손자도 모르고

오직 외숙모 치마꼬리만 붙잡고 있는 사람을 그렇게는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자식 같으면 그렇게 떼어놓겠냐는 것이다.

 

그 말에 눈물이 났다.

사랑은 문학이 아니다.

우리가 아무리 사랑을 아름답게 묘사해도 슬프고 안타깝게 표현해도

문학으로 나타낼 수 없는 것이 있다.

시로 그림으로 노래로 사랑을 표현한다해도

똥싸고 손 놓치면 밖으로 뛰어나가고 밥만 먹어 배불뚝이가 된 남편

50대의 여성이 감당하기 쉽지않다.

더구나 그 남편으로 인해 성스런 사랑을 나누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그를 가엾게 안 보기란 쉽지않다.

 

문학적으로는, 글로 쓰는 것는 다 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게 내일, 내 목숨을 잦는 일이라면 그 일을 어찌 감당할까?

 

나는 죽음과 사랑은 문학이 아니라 신이 조종하는 섭리로 생각한다.

신에 의해 조종되는 죽음과 사랑을 어찌 우리 사람들이 판단할 것인가.

 

어제 외숙모와 통화했다.

그 남편을 돌보기 위해, 좀더 과학적으로 보살피기 위해

좀더 사랑의 마음으로 견디기 위해

요양보호사 자격증을 공부하고 있는 외숙모에게

나보다 겨우 한 살 더먹은 ..신의 섭리로 사랑을 실천하는 외숙모에게

외숙모 화이팅을 전했다.

 

하하 웃으며..고마워 하는 씩씩한 외숙모...그가 성자다.

 

나는

천분의 일도 따라갈 수 없는 지극한 성자다.

 

~~때문에 시작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천하는 것이라는 사랑.

그 사랑을 함부로 문학적인 짧음으로 표현하지 않기 바란다.

 

나 역시도.